
[매일안전신문] 2026년 4월 말, 전남 담양의 한 장독대 앞에는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셰프들이 모이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들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한식 레시피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발효가 만들어내는 깊은 맛의 원리와 장이 익어가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음식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간장을 단순한 양념이 아닌 발효와 장맛의 과학으로 바라봤습니다.
최근 해외 셰프들이 한국의 장인들을 찾아오는 발걸음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남 담양의 기순도 발효학교에는 미국 유명 셰프들이 찾아와 메주 만들기와 장 담그기를 배웠습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기순도 명인뿐 아니라 김치 명인 이하연, 사찰음식의 대가 정관 스님까지 찾아다니며 한국 음식의 뿌리를 경험했습니다. 항공료와 숙박비를 포함해 약 1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이 들었지만 모집은 빠르게 마감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K푸드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줍니다. 과거의 한류 음식 열풍이 김치, 비빔밥, 불고기, 라면처럼 ‘무엇을 먹느냐’에 집중됐다면, 지금 세계 미식계가 궁금해하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입니다. 왜 된장은 깊은 맛을 내는지, 김치는 어떤 발효 과정을 거치는지, 사찰 음식은 최소한의 재료로 어떻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K푸드의 관심이 메뉴에서 원리로, 소비에서 배움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쿠킹 클래스가 아니라 한식의 뿌리를 배우는 전문 과정에 가깝습니다.
한식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해외 소비자들의 한식 만족도는 94.2%에 달했습니다. 음악과 드라마를 통해 시작된 한류가 음식과 생활문화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수출 실적도 눈에 띕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간장·고추장·된장 등을 포함한 한국 소스류 수출액은 2024년 3억9,400만 달러를 기록하며 2016년보다 두 배 이상 성장했습니다. 고추장 수출액도 6천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세계는 이제 한국 음식을 먹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맛을 만드는 발효의 원리와 문화까지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장 문화는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2024년 유네스코는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했습니다. 유네스코는 장 담그기를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지식과 기술, 공동체 문화로 평가했습니다.
기순도 발효학교의 풍경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입니다. 외국 셰프들은 직접 콩을 찧어 메주를 만들고 장독을 관리합니다. 발효 기간을 기록하고 햇빛과 바람까지 관찰합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레시피가 아니라 시간입니다. 한국 음식의 핵심인 기다림과 손맛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장은 참 특별합니다. 콩과 소금, 물이라는 단순한 재료가 계절을 지나며 전혀 다른 맛으로 변합니다. 햇빛과 바람, 온도와 습도, 사람의 손길이 모두 맛의 일부가 됩니다. 현대 요리가 정밀한 계량과 과학적 조리를 중시한다면, 한국의 장은 그 과학 위에 오랜 세월 축적된 생활의 지혜를 더합니다.
한국의 장인들은 이제 세계 미식계의 스승이 되고 있습니다. 기순도 명인은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평가받는 페루의 센트럴과 스페인의 디스푸르타르 셰프들에게 장을 가르쳐 왔습니다. 여러 나라 셰프들의 이름이 적힌 장독이 담양에서 관리되고 있으며, 발효가 끝나면 직접 찾아오거나 해외 레스토랑으로 보내집니다. 빠름보다 기다림을 선택한 셈입니다.
김치 명인 이하연은 국내외에 김치를 알려왔고, 그의 김치는 영국 찰스 3세 국왕에게 전달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관 스님의 사찰음식 역시 세계 각국의 셰프들을 백양사로 이끌고 있습니다. 제철 재료와 절제된 조리법, 자연과 생명을 존중하는 철학은 지속가능성과 채식을 중시하는 세계 미식계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과제도 있습니다. 한국 음식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해외 셰프와 학생은 늘고 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연결할 교육 시스템은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K푸드가 유행을 넘어 세계적인 교육 콘텐츠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전통 장인과 현대 요리인, 해외 학습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세계의 셰프들이 한국에 와서 장독 앞에 서는 이유는 단순히 음식이 맛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시간과 기다림이 있고, 발효의 과학이 있으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온 지혜가 있습니다. 한식은 이제 맛보는 단계를 넘어 배우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담양의 장독 앞에서 메주를 만지며 질문을 쏟아내는 세계의 셰프들. 그들의 모습은 K푸드의 다음 장면을 보여줍니다. 한국 음식은 더 이상 세계인이 소비하는 유행이 아닙니다. 이제는 세계인이 찾아와 배우고 연구하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오늘도 묵묵히 시간을 빚어내고 있는 한국의 장인들과 장독대가 서 있습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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